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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신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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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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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른 신은 없었습니다.
성경> 신32:1-14
찬송> 429, 434장


우리가 오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 '신명기'라는 성경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요단강 건너편 광야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난 40년을 회고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신1:1에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신명기 마지막 34장에는 모세의 죽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 신명기서는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염려한 나머지 출애굽 제 2세대들에게 다시 가르친 율법의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한 노래를 불러 백성들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워 불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해야할 도리를 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 노래의 내용은 백성들의 타락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암울한 주제였습니다.
백성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삶과 사고 방식이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봉독한 본문은 바로 그 노래의 가사의 일부분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해 오셨는지 지난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를 통해 자신을 밝히신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곧 우리들 자신이며 그들이 보낸 광야의 세월은 이 땅에서 우리의 인생의 세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001년 금년에 바로 그 광야 세월 중의 한 해를 살아왔고 또 남은 광야의 길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나타난 하나님, 곧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1.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하나님입니다. 곧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하나님입니다.
9절에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은 정말 감사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찍었다
9절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이 세상에 각 나라와 족속, 백성을 두고 신들이 자기를 섬기도록 한 나라 한 민족씩 택했는데 하나님의 몫은 이스라엘 백성이다'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에게 찍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야, 어느 누구, 또 어떤 신도 너희를 차지할 수 없어!"
사43:1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찍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신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을 아십시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이 없어 다른 신들에게 기웃거릴 때도 다른 신들이 우리를 자기의 것으로 삼지 못하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왜 이것이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가장 위대한 분에게 찍혔기 때문입니다. 별 힘도 없는 귀신이 여러분을 찍었으면 어떡할 뻔했습니까? 헛된 우상 종교의 신이 여러분을 찍었으면 어떡할 뻔했습니까?
여러분, 이상하고 추잡한 신들에게 자신을 내어 줘 버린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 바로 앞길에만 해도 곳곳에 꽂혀있는 대나무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불쌍합니까?
무당들은 예수쟁이들이 있으면 굿이 안된다고 쫓아냅니다. 점쟁이들은 예수쟁이가 왔다고 점을 안 봐준답니다. 그들 스스로 형편없는 잡귀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힘없는 귀신을 믿고 있으니 말입니다.
또 힌두교도들은 평생 소에게 절하다가 죽습니다. 어떤 회교나라의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가차없이 벌을 받는데 손으로 죄를 지으면 손을 잘라버리고, 발로 죄를 지으면 발을 잘라 버립니다. 그들 스스로 그들의 신을 택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의 신에 찍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신들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들 나라와 민족에서 선교가 그토록 어려운 것도 그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찍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신이 우리를 찍었다고요? 9절에 나온 이름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에 여호와라는 이름은 언약과 관계되었을 때 사용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음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끊지 못할 언약의 관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는데 그 계약서에 보니까 이렇게 적혀있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이 백성을 버릴 시에는 내 목숨을 내어놓겠다"
예)창15장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말씀하시니 아브람이 묻습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을로 알리이까?"
그 때 하나님이 짐승(소, 염소, 양, 비둘기)을 취하여 쪼개놓도록 하십니다. 그리고는 횃불이 그 사이로 지나가는데 그 횃불을 하나님 자신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 언약을 해 주시고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시면서 만일 내가 이 언약을 어길 시에는 이 짐승들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한 번 우리를 택하셨으면 그것은 영원하다는 말입니다.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야곱
9절에서 또 하나 더 관심있게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라는 이름입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야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야곱'이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를 아시죠. 이스라엘과 야곱은 동일인입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이전의 이름입니다. 왜 이름이 개명되었습니까? 야곱은 인간적이며 간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 주셨는데 그 때 바뀐 이름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후 야곱이란 이름은 점점 사라지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변하지 않는 야곱의 모습을 나타낼 때는 그대로 야곱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야곱이라는 이름이 또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조상 야곱처럼 간사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변경할 수 없고 앞으로도 그것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인간적인 허물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무효로 만들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대로 마음먹고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43:1을 봅니다. 거기에도 "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족하며 연약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자격도 갖춘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선택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주위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도무지 예쁘지 않는데 여러 조건을 비교해 보아도 그 자매는 아닌데 너무나 좋은 조건을 갖춘 형제가 그 자매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목숨걸고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합니다. "정신 좀 차려라" "그 여자가 뭐가 그리도 좋니"하고 핀잔을 줍니다. 그러나 그게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데 네가 왜 그러냐"고 말하면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찬송 410장 -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너무나 위대하신 천지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말입니다.

2.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10)
10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이 말씀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주신 사실을 요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시고는 그 다음에는 내팽겨쳐 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든지 난 모르겠다" 무관심하게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한 번 택하시면 끝까지 책임을 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던 광야 40년을 기적적으로 지냈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 죽을 번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물을 주셨습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지자 하늘에서 내리는 식물, 만나로 먹이셨습니다. 고기 생각이 나서 불평하자 메추라기를 보내셨습니다. 어디로 갈 지 몰라 방황하자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어떤 외부적인 것으로부터 위협이 가해질 때 우리의 몸에서 가장 빠르게 반응을 보이는 곳이 바로 눈입니다. 조그만 움직임에도 눈은 깜박거립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보호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이제는 우리를 그렇게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또 보호하실 것입니다.

이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심의 은혜가 금년 한 해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는데 우리가 몰랐다면 이제 우리는 이 보호하심을 은혜를 다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3. 자신의 백성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11)
하나님이 보호하셨다고 말하면, 여러분 가운데 그러면 그 어려웠던 시기는 무엇인가? 그토록 어려워 살 소망이 다 없어진 그 시절에는 하나님인 주무시고 계셨는가? 하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본문 11절에는 하나님을 보호해 주시지만 그 보호속에는 훈련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씀합니다. 모세는 노래하기를 바로 이 훈련을 독수리가 자기의 새끼를 훈련시키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짐승 중에 독수리는 공중의 제왕입니다. 그의 창공을 나르는 힘은 어느 다른 날짐승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또 신속하게 하강하여 먹이를 낚아채는 것도 당할 자 없습니다.(찬송가 394장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라고 찬송합니다.)그리고 공중에 날개를 쭉 펴고 날고 있을 때 그 위용은 공중의 제왕답습니다.
그런데 독수리의 그 위용은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생겨진 것이 아닙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가 어릴 때부터 공중의 제왕이 되는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오늘 본문 1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의 날개 짓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둥지에 있는 새끼 독수리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11절을 봅시다.
이에 대한 표준번역성경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둥지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어미가 먹이를 가져다주는 곳입니다. 편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다가는 독수리로서 본래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정한 때가 되었을 때 어미는 가차없이 새끼의 보금자리를 뒤흔들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새끼들을 강제로 낚아채서 저 높은 창공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인정사정없이 던져버립니다. 새끼들은 땅으로 한없이 추락하면서 날개를 버둥거리기 시작합니다.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새끼들의 생각에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 되어 버렸습니다. 추락하던 땅은 점점 가까워 옵니다. 이젠 죽었구나 생각하는데 어느 샌가 어미가 밑에 날아와 그 날개 위에 사뿐히 얹혀 놓는 것입니다.

죽일 작정이었던 것이 아니라 날개 짓을 위한 훈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새끼 독수리는 날개 짓을 배우고 점점 공중의 제왕이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속에서 이젠 죽었구나하고 생각하셨던 적이 많이 있으시죠?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되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큰 날개로 여러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개 그늘에 쉼을 얻기도 합니다.
♬찬송 478장 -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평안히 쉬리로다"

여러분, 금년 한 해를 보내시면서 얼마나 많이 훈련 받으셨습니까? 이젠 날개 짓을 좀 하시나요? 혼자서도 날 수 있으신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이제 곧 가나안 땅, 우상이 득실거리는 그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데 훈련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살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이 거친 세상에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기로 하셨다면 훈련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정금같이 나오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의 훈련 기간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옆에서 지켜보고 계실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 곤하고 지칠 때 잠간 뒤돌아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항상 거기에 계실 것입니다.

4. 우리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13-14)
훈련이 훈련으로만 끝나면 그 훈련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훈련시키시는 것은 더욱 풍성한 삶을 위해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13-14절에는 이렇게 훈련된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땅에서 누릴 것을 위해 훈련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되고 아름다운 것이 예비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신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을 성경이 우리에게 선언해준 대로 정확하게 고백해야할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금년 한 해의 세모(歲暮) 끝에 와 있습니다. 금년 한 해도 돌이켜보면 세계적으로,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해야했습니다.
금년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분명히 고백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 외에 없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외에 다른 분이 없습니다. 그 어떤 다른 신이 우리를 도울 수 없었고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생을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정말 어려운 때도 있었지만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우리를 도운 다른 신은 없었습니다.

인생의 험한 질곡을 걸어온 어느 한 성도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는 아무도 없는 바닷가 백사장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 두 발자국이 하나는 자신의 발자국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백사장의 발자국은 인생의 발자국이었습니다. 다른 한 발자국은 누구의 것일까 유심히 보다가 곧 바로 주님의 발자국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주님 나의 인생 길에 나와 함께 해 주셨음을 감사합니다."하고 말하고 있는데 그 발자국이 갑자기 하나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만의 발자국이 나 있는 그 시기를 생각해 보니 그가 가장 힘들어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주님 그러면 그렇지, 내가 왜 그때 그렇게 힘들었는지 알겠어요, 왜 주님 그 힘든 시기에 나를 혼자 두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힘들 수 밖에요."하며 불평을 늘어놓는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발자국을 자세히 보아라 누구의 발자국이냐?" 그 발자국을 자세히 보니 그것은 자기의 발자국이 아니라 주님의 발자국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주님, 그때 저는 어디에 있었나요?"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너는 내 등에 업혀 있었느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이 우리를 모른다고 버리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다른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의 백성입니다. 그는 우리를 놓으실 수 없는 분입니다.
여기에까지 동행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남은 생애에도 함께 하시며 동행하실 것입니다.
흔들림없는 믿음으로 주만 바라보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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