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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베드로의 새로운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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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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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과 베드로의 새로운 만남
성경> 눅5:1-11
찬송> 325, 351장


만남의 종류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만남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이제까지 우리의 인생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모를 만납니다. 우리의 부모는 알게 모르게 현재의 우리의 모습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 우리의 현재의 모습은 어떤 스승을 만났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또 어떤 친구를 만났느냐에 따라 달라졌을 것입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만남은 배우자와의 만남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아내를, 어떤 남편을 만났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만남이란 항상 사람과의 만남이 전부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책을 만나 가치관이 바뀝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좋은 음악을, 어떤 사람은 좋은 미술작품을 만나 그의 인생이 변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만남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또 하나의 만남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만남은 인생이 만날 수 있는 만남 중에 가장 위대한 만남입니다. 가장 진지한 만남입니다. 가장 소중한 만남입니다. 만나지 않으면 안 될 만남입니다. 그 만남은 바로 신(神), 곧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중에 누가 어릴 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다른 집에 입양되어 자란 사람이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을 나아준 부모를 꼭 한 번 만나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자주 신문에서 우리 나라에서 외국으로 입양되어 간 아이들이 장성하여 모국의 부모를 찾는 기사를 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버릴 수 없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육신적으로 잃어버린 부모를 만나고자하는 간절함이 있다고 하면, 영적으로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갈망해도 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정확하게 바로 찾을 만한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는 하나님이 베드로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주어진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과 베드로의 또 다른 만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고 기다리시는 진정한 만남에 대해 말씀을 받겠습니다.

베드로!
베드로,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한 평생을 보내며 잔뼈가 굳은 사람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실제로는 바다가 아니라 호수였습니다. 본문에는 게네사렛 호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곳은 디베랴 바다라고 되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명칭은 이 갈릴리 호수가 여러 지역에 연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다라고 한 것은 호수치고는 너무 넓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그는 전문적인 학문을 배운 사람은 아니지만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것 하나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최대의 목표는 갈릴리 바다에서 최고의 어부가 되는 것이며, 고기로 인해 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는 그의 조국의 형편이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어부인 그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부담이 생길 때마다 무시하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그 날 그 날 고기만 많이 잡히는 것에 자신의 심혈을 쏟았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첫 번째 만남
그러던 어느 날, 베드로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그의 형제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란 사람을 만나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본문의 말씀 속의 사건이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만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막연하게 생각하면 이 사건이 첫 만남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헌신하는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베드로가 제자로서 헌신하게 되는 기사로 잘 알려진 다른 복음서 기록들이 더 익숙할 수 있습니다.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막 1:16-18 / 마태복음 4:18-20에 동일한 본문)

여기에서는 베드로 곧 시몬이 예수님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니 곧 바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른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알아야 할 것은 성경 각 권마다 기록한 사람의 의도가 있고, 그 의도에 따라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강조된 것은 베드로의 결론적 행동입니다. 베드로가 결국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중간의 그 과정보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헌신하게 된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르실 때 곧 바로 따라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만남은 요1:41에 나옵니다. 베드로는 그의 형제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안드레는 먼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큰 감동을 받았고 베드로에게 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하고 말하며 예수님을 소개하고 만나 보기를 권유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때 예수님은 그를 보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번째 만남이었습니다.

그 후의 만남들
이 첫 번째 만남 이후로 베드로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안드레를 통해 예수란 사람을 '메시아'로 소개받았습니다. 그들의 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말입니다. 애써 짓누르고 살고있던 그의 민족에 대한 애족심과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이 다시 그를 괴롭히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음속의 혼란은 점점 더해 갔습니다.

그후 그는 드러나지 않게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는 집회에도 가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았습니다. 멀리서 예수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또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쉽게 결론을 내리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그의 형제 안드레가 부러웠습니다. 가슴에 가득한 혼란을 지닌 채, 시몬의 결단을 미룬 방황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또 아주 중대한 사건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열병은 치사율이 높았습니다. 예수님이 열병을 막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곧 열은 내리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전에 그와 관련이 없는 사람을 고쳐주실 때와는 느낌이 달랐습니다.(눅4:38-39)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여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만남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런 베드로를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신이 사람을 찾아오는 사건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 길을 열어주어도 결단하지 못하고 주저합니다. 그러다 영원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직접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기독교가 다른 많은 종교와 그 가치를 달리하는 것은 바로 이 한가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많은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는 종교입니다. 그러다가 만들어진 것이 종교라는 형태로, 이름으로 치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이, 곧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인간이 범죄했을 때 먼저 찾아오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찾아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하고 부르셨습니다.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을 찾아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도 하나님이 먼저 보내신 것이지 인간이 요청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찾아오신 신을 영접하지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되셔 인간의 모습으로 섬기시려 하였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날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아침 일찍 찾아가셨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점점 높아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수소문하여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 날 아침 베드로는 야간 철야 작업을 하고 그물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말씀 듣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배를 좀 빌려달라고 요청하여 배에서 해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한 사람 베드로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 한 사람이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오늘 바로 이 시간 여러분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은혜입니다.

본문에는 그날 가르치신 말씀이 무엇인지는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누가의 관심이 예수님의 설교가 아니라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새로운 만남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미 예수님이 베드로의 지난밤의 상황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지난밤에 밤이 새도록 수고하여 이곳 저곳에 그물을 내렸지만 잡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말 베드로의 어부 인생에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이상한 날을 넘어 치욕적인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그물을 거두어 씻고 있는 베드로에게 다시 그물을 던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5절입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의 명령의 순종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어찌했던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복된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어려운 몇 가지 여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고기 잡는 전문가이지만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다.
둘째, 안 잡아 본 것이 아니라 지난 밤 새 그물을 던져 보았다.
셋째, 지금은 그물을 다시 챙기고 있다. 던졌다가 허탕치고 다시 그물을 씻고 거두는 것은 수고가 따른다.
넷째, 지금 베드로는 밤새 작업을 하였기에 상당히 피곤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단한 은혜라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은혜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의 생애 속에 이 은혜가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자주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나는 맞다고 결정하지만 나의 결정이 항상 옳은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그 길을 막아주십시오"
"하나님 나의 감정적으로 나의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싫은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나의 길을 막아주십시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게 해 주십시오"

성도 여러분, 결국은 베드로가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얼마나 큰 복으로 나타났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6-7절을 봅시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이제 우리가 정말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할 부분이 나왔습니다. 베드로는 이 주어진 결과를 두고 어떤 반응을 나타내었느냐는 것입니다. 8절을 봅시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먼저 베드로는 주어진 사건을 보았습니다. 이 주어진 사건 상황을 보고 어떤 반응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의 반응을 무엇이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현재의 만남과 이전의 만남은 무엇이 다른가?
사실 예상되는 베드로의 대답은 이런 것일 수 있습니다. "당신의 고기 잡는 기술이 정말 대단하군요? 어떻게 배웠습니까? 물 때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서 고기가 모여 있는 곳을 압니까? 저에게 좀 가르쳐 줄 수 없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의외의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있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느닷없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베드로가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주'를 찾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이 고민은 그 형태와 방법을 달리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이런 고민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더 깊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지만 결단하여 주님께 자신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 만남, 곧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①창조주와 인간의 만남입니다.
베드로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기 앞에 서신 이 예수라는 분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분은 갈릴리 바다의 고기까지 통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②하나님과 죄인의 만남입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상합니다. 왜 많은 말 중에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였을까요? 그것은 자기 앞에 계신 예수라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경험하는 순간(-"이를 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앞에 서 있는 분은 죄와 상종할 수 없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흉악한 죄인으로서 상종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제발 자신을 떠나 달라는 것 외에 없었습니다.

③구속주와 사명자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버리고 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그분은 새로운 삶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육신의 일에만 매여 일생을 다 보내버리는 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영혼을 위해 값어치있는 일을 하도록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가기로 작정할 때에도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때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을 위해 살게 해 주십시오. 그 일이라면 나의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는 일을 위해 살게 해 주옵소서"
여러분,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는 길만이 가장 복된 길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에게 맞는 일을 원한 것입니다.

진정한 만남의 자리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드디어 제대로 만난 것입니다. 정상적인 관계로 만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전에도 예수님을 만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적당한 만남이었습니다. 호기심 속의 만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는 그런 만남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만남을 이루십시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바로 만남 사람은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행복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 우리의 만남을 점검해 보십시다. 그리고 그 만남이 정확한 만이 되도록 합시다. 주님이 주신 사명으로 기쁨의 삶이 되게 합시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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