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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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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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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회의 사명
성경> 행3:1-10
찬송> 91, 245장


●장산교회는 왜 있어야 하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교회당으로 발걸음을 옮기시면서 다른 교회당 십자가를 몇 개나 보면서 오셨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한 상가 건물 안에 교회가 두 개 이상 입주한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같은 입구를 쓰는 4층 건물에 1층과 3층이 교회 사용 건물이어서 교육관으로 사용하는 줄 알았더니 교회 간판이 두 개가 붙어 있었습니다.
또 요사이 교역자 수가 너무 많다고 합니다. 즉 신학생이 너무 많이 배출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한정되어 있는데 목사들은 자꾸 많이 배출되니 임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임 목사들의 수가 갈수록 늘어 이것이 각 교단마다 해결해야될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우선 이런 질문을 성도 여러분께 던집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 장산교회는 꼭 존재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 반여동, 재송동 일대에 우리 교회 말고도 많은 교회가 있지 않습니까? 교회도 너무 많은데 다른 교회를 위해 우리 교회가 양보해 줘 버리면 안될까요?
이렇게 말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양보를 하려면 다른 교회가 양보를 하고 문을 닫아야지 왜 우리교회가 문을 닫습니까? 그래도 우리 교회는 이 지역에서 일찍이 자리를 잡은 교회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제가 드린 말씀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한 분입니다. 교회란 이 교회, 저 교회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들을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사실을 고백해야합니다. 제가 말씀을 드린 의도는 '왜 우리 교회가 이 시대에 이 지역에 존재해야하는가?'하는 말입니다. 만약 그 이유가 분명하다면 이 주위에 그렇게 많은 교회가 있을지라도 장산교회는 분명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정말 불분명하다거나 그 이유를 모르겠다면 솔직히 우리는 이 많은 교회 가운데 또 한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 그래서 존재할 이유가 분명한 교회,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요소를 잃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지켜나가는 교회, 바로 그 교회에 대해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하십니다.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게 일어나던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의 전체 종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듭니다. 이 일로 사도들은 핍박을 받게 되고 유대교의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더욱 심하게 됩니다. 중심 인물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사건은 이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면서 성전 문에 앉아 구걸하고있는 앉은뱅이를 고치면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건의 정황 속에 나타난 것들을 생각하며 오늘날의 하나님의 교회가, 이 시대의 이 지역 속에 있는 장산교회가 잃어버리거나 잊어서는 안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한 앉은뱅이를 낫게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성전 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 이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앉은뱅이가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2장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예루살렘 교회는 어쩌면 지상에서 가장 크고 완전에 가까운 부흥을 누리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가장 완벽에 가까운 부흥을 누리고 있던 교회의 지도자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이들을 통해 일어난 앉은뱅이의 치유 사건. 이들은 무엇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는가?'말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이 있는 것입니다. 왜 이 땅에 교회는 존재해야하고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사명은 무엇인지?

베드로와 요한은 그날도 제 구시에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성전으로 들어가는 미문(美門)이라는 곳에 태어나면서 앉은뱅이였던 한 사람이 구걸하기 위해 사람들에 의해 날마다 옮겨져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통로에 따라 몇 가지 문을 거치게 되어 있는데 이 미문은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은 '미문'이라는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문이 고린도식 건축양식을 따라 지은 것으로서 "은으로 도금을 입히고 금을 박은" 문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화려한 문 아래 멍석을 깔고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는 지금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구걸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도와 달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앉은뱅이의 모습에서 인생들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의 화려함 아래 자신을 치장하려 하지만 사실을 무엇이 부족하여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는 인생의 모습 말입니다. 떳떳하게 일어나 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구의 몸이 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동네에 지척으로 깔려 있습니다. 그들은 그럴싸하게 자신을 치장합니다만 사실은 그들은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가운데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앉은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것은 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서 바울에게 있었던 눈의 비늘이 벗어지기 전에는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모릅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이 한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합이라…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39, 41)
무슨 말씀입니까?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면서 자신이 보는 것이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받게 될 심판의 말씀입니다.
(예- 마게도냐인의 환상)

그렇습니다. 얼핏보면 이 세상은 스스로의 힘으로 잘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많이 교육받고 넉넉한 재물을 누리고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입니다.

여러분, 절대 속지 마십시오. 세상의 사는 인생들은 앉은뱅이입니다. 미문의 화려함만 보고 속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성전 안에 들어오지 않고 성전 밖에 머물고 있는 인생은 아무리 화려해도 구걸하는 인생입니다. 무엇이 부족하여 허덕이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속지 말아야 할 성도들이 도리어 속아 세상의 화려함에 현혹되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 떼 주려 갔다가 혹을 하나 더 달고 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다 앉은뱅이로 보면 됩니다. 물질의 유무에 관계없이, 지식의 유무에 관계없이, 권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두 다 앉은뱅이로 보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교회)를 기다리는 인생
여러분, 그런데 이 앉은뱅이가 지나는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진정으로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입니까? 날마다 이 사람을 업고 다니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주면 되겠습니까? 여러분 돈 많았던 세리장 삭개오의 공허함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가 왜 뽕나무 위에까지 올라가야 했겠습니까? 체통을 좀 지킬 것 아닙니까? 그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는 안될 만한 그 영혼의 공허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에게 무엇보다 더욱 완벽한 도움은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에게는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남으로 이 자리를 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에게는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을 거기에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진정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건너와서 도와달라고 외치는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때로 그들은 도도하게 굴고 자만심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 보입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을 경멸하기도하며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방자함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은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파스칼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퍼즐 조각 놀이가 있습니다. 그 놀이는 다른 모든 조각을 제자리에 잘 맞추어도 한 조각을 잘못 맞추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조각이 제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으로 채워야 할 공간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하니 인생은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그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이 조각 저 조각을 갖다 붙여보아도 맞아않아 만족함이 없는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조각을 들고 가도록 부름을 받을 하나님의 사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나타내는 인간적인 반응에 분내지 말고 예수님처럼 "주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4-5절을 보십시오. 그 당시의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앉은뱅이를 향하여 "우리를 보라"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을까"하고 바라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 줄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앉은뱅이는 또 크게 얻을 것을 기대하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려고 하는 사람과 받으려고 하는 사람 사이의 의도가 너무도 크게 차이납니다. 분명 이 앉은뱅이는 돈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려는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예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해버립니다.

은 금으로 치장되어진 미문 아래서 은 금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베드로의 이 말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살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세상의 것 가지고는 인생이 가진 문제를 진정 해결해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예 없다고 말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의 말은 거짓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은과 금이 없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는 성도들이 바친 것들로 재물이 꽤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자 자기의 소유물을 자기의 것이라 여기지 않고 교회 공동체로 갖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아예 은과 금은 없다고 말해 버리는 것입니까? 이 불쌍한 앉은뱅이에게 돈으로 조금 구제하였다고 하여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함으로써 은과 금으로 자신의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앉은뱅이의 어리석은 기대를 완전히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물질이 필요하지만 물질로 사람을 절대 구원할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의미 있게 축하해 줄 일이 아니면 교회에서 함부로 물질 공세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절대 구원을 미끼로 경품을 붙이지 않습니다. 새신자들이 처음 와서 등록할 때부터 너무 과한 선물을 주는 교회가 있습니다. 등록해서 집을 심방할 때는 우리가 어느 집을 가든지 빈손으로 가는 것은 우리 문화 속에 예의가 아니니 조그만 선물을 가지고 가지만, 그냥 교회에 한 번 와 주는 것으로 선물 꾸러미를 준비해 놓고 주는 교회가 있습니다. 잘못하면 영혼을 도리어 망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미끼로 교회에 나와 복음을 듣지 않습니까?"하고 말할 수도 있는데,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런 사람은 선물 안 줘도 복음에 귀가 열릴 사람입니다. 절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교회 전도집회에 가보면 집회시간이 정리가 안된 채 어수선하기 그지없습니다. 선물 받는 데서부터 그렇습니다. 그 날 받은 선물 꾸러미를 간수하느라 예배시간은 더욱 어수선합니다. 사람 동원하는데는 성공했는데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데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물이 그 사람을 구원시키지 못하고 또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하면 교회의 본질을 사람들에게 왜곡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교인들과 교회가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런 곳이 아닌데 교회를 오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물질공세를 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새신자들이 교회와서 등록하면 성경 찬송도 자기의 돈을 주고 사라고 합니다. 그게 더 의미 있습니다. 물론 가까운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선물을 해 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사서 지니고 다니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영혼의 양식입니다.

다시 사도들과 앉은뱅이의 관계로 돌아가서, 베드로가 은과 금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앉은뱅이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것 아닙니까? 줄게 없으면 그냥 갈 것이지 괜히 사람을 쳐다보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게 만들고는 없다고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놀리는 것입니까?
"은금이 없다면 왜 나를 보라고 해, 별 볼 일 없으니 가버려"
그러나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아예 그냥 포기 할 것 같으면 보라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야, 그래도 너는 나를 봐야해!" 나를 보라구 네가 기대하는 것 이상의 것을 줄테니까!
김기동집사의 간증이 생각이 나서 또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이 공손히 인사를 하면 누군가하고 반응을 보이다가 예수믿으십니까?하고 물어보면 그 때부터 인상이 확 바뀝니다. "이거 뭐야, 예수쟁이잖아" "내가 기대했던 것은 하나도 없고 뭐 이런 별 볼일 없는 것이 와서"
이런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면 '생 고구마'라고 했습니다. 그 때 해 주는 말이 "그래도 믿어야 됩니다"
저는 지금 사도들과 앉은뱅이와의 관계를 이런 시각으로 봅니다. 앉은뱅이는 은과 금이 없다는 말에 실망을 합니다. "별 볼이 없잖아. 내가 원하던 것이 없는데 더 이상 앞에서 얼른거리지 말고 빨리 가봐"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봐야 합니다. 그래도 당신이 예수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그들은 물질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없다고 말하고,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본질적인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은과 금을 가지고는 할 수 없는 더 큰 일을 능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혼을 구원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능력에 비해 물질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물질을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상실하면 그 때부터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이 바로 돈입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요청해라 그러면 우리가 그것은 할 수 있겠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대신에 돈을 쌓아 둔 곳이 많습니다.
교회가 구령의 능력을 소유하였을 때에는 세상이 바라는 '은과 금'을 축적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 있었고 이 세상 모든 보화보다도 더 귀한 그리스도께서 친히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상실했을 때 은 금에 대한 관심은 높아 가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부를 축적하기 위해 세속적인 성취 방법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능력을 잃어버리면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뒤 배설물로 여겼던 것들에 다시 마음이 가기 시작하고, 이전에 결단하고 버렸던 것들을 다시 주어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만 자랑하려던 것이 변하여 그리스도 이외에 자랑할 거리들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함께 계시며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총을 잃어버리자 그 공허함을 세상의 은금으로 메워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섬김을 천주교처럼 사회 봉사로 대신하고, 애통해야할 기도 시간을 사교적인 모임으로 대치하고, 신령한 예배 모임 대신에 우정을 나누는 교회 분위기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입니다.(벧후2:22)

정말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물질 세계에서 물질을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우리의 신앙고백을 물질로 표현하지만 우리가 정말 혼돈해서는 안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은과 금은 사람을 변화시킬수 없다. 은과 금은 영혼을 구원시킬 수 없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날의 교회가 이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교회가 끝까지 지켜야할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제가 잠시 이것 때문에 실족할 번했습니다. 장산비전헌금은 그대로 기도했던 것만큼 나왔고(어려운 가운데 작정하시고 헌금에 동참하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이전 보다 교회의 재정적인 상황이 조금 나아질 수 있겠구나! 그러면 돈 걱정하느라고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 좀 숨쉬며 할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하나님이 그게 아니다고 싸인을 주셨습니다. 제가 교만할 번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돌고 돈다고 돈이라고 한다는데 이 도는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다가 필요한 곳에는 주시고 또 줄 만한 사람에게 주십니다.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명분이 분명하면 하나님은 돈을 주신다. 교회도 그렇고 성도 각자에게도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를 위해 해야할 일이며 그것의 가장 중심에는 영혼 구원이 있습니다.

●맺으면서
성도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은 무엇입니까? 우리교회가 많은 교회 중에서 그래도 이 시대에 이 지역에 존재해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고 우리 교회는 내게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고백하고 이것 때문에 사는 성도가, 그리고 교회가 될 수 있는지.
우리가 바로 이 고백을 정확하고 바로 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이 이 시대 이 지역에 분명하게 들어 쓰시는 교회가 될 것이며, 또 들어 쓰시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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