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야곱의 인생에서 이스라엘의 인생으로
성경> 창32:22-32
찬송> 317, 331장
1. 야곱의 인생
1)월드컵 환희 뒤의 쓸쓸함
성도 여러분, 요사이 가장 큰 화제거리는 축구 이야기입니다. 한국은 16강에 진출했고 또 이제 화요일에 있을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이겨 8강까지 진출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TV나 신문지상의 보도 중에서 반이 넘게 축구와 관련한 기사를 싣고 있고 우리 교회에서도 지난 예선전 세 게임을 본당 대형 스크린을 이용해 보면서 함께 응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경기를 치르고 응원을 할 수록 정말 우리 나라의 국민들은 독특한 국민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이웃 일본에만 해도 공동 개최국이지만 월드컵의 열기가 경기가 열리는 도시에만 시껄벅적하지 타 도시에서는 실제 그렇게 뜨겁지 않다고 합니다. 일본의 수도인 동경에 가 본 사람의 이야기로는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일본에서 과연 월드컵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라고 합니다.(아무리 경기가 없는 도시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수도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온 나라 전체가 축구에 목숨을 걸고 살아온 나라인 것처럼 떠들썩합니다. 실제 중남미 국가보다 훨씬 더 열광적입니다. 앞으로 월드컵이 끝나면 또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살 것인지 걱정까지 됩니다.
그래서 제가 권찰회나 금요기도회 때 따라 해 보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또 함께 따라해 봅시다.
"즐기기는 즐기되 목숨걸지 맙시다."
여러분, 요사이 월드컵 중계 때문에 성질나는 분들 있지요? 연속극을 보고 싶은데 중단되거나 시간이 변경되어 늦게 하니까요. 불평하자니 이런 국민적인 월드컵 분위기에 매국노 같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월드컵의 열기 속에 영화관이 텅 빌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런 점을 역이용해 성공적으로 상영하고 있는 영화가 있다고 합니다. 영화의 제목은 '해적, 디스코 왕이 되다'입니다. 주말에 서울에서만 15만 2천 여명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영화들이 월드컵 기간이라 개봉을 미루고 있는 틈을 이용한 것도 있지만 축구만 구경하기에는 식상한 사람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온 세상이 '월드컵, 월드컵'이라고 떠들고, '축구, 축구'하지만 그것과는 관련없는 사람들은 역시 있습니다. 모두가 기쁨의 환호를 지르고 즐거워할 때에도 그 기쁨과 즐거움과는 별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16강에 올랐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득을 볼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목 터져라 응원했지만 1억, 2억씩 포상금 받는 사람들은 선수들이고 병역 혜택받는 사람은 우리의 아들이 아니라 다 나하고 상관이 없는 선수들 아닙니까? 우리에게 고물조차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우리의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 수고하고 힘든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또 월드컵과 같은 이벤트로 우리를 즐겁게 하려고 할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기뻐할 때에도 고통 속에 눈물을 흘려야하고, 다들 당신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할 때에도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당신이 내 신세가 돼봐라!'고 말할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들 "너는 무슨 부족한 것이 있느냐? 돈 많은 집안에, 아버지 교수겠다, 미국 유학까지 하고…"하며 부러워했지만 아버지를 그렇게 미워했고 증오한 나머지 아버지와 할머니를 죽이고 불을 질러 살인을 위장해야하는 아들도 있었습니다.
예화)어느 날 프랑스 파리의 정신과 병원에 한 청년이 우울증을 호소하면서 찾아와 상담을 하였습니다. 의사는 이 이 우울증 환자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렇게 방안에만 계시지 말고 밖에 나가서 그 유명한 희극 배우 그리말디의 쇼를 보십시오. 그 쇼를 보고 나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그 청년은 의사의 권고에 아무 대답도 안하고 조용히 병원을 나서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선생님, 내가 바로 그 희극 배우 그리말디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말디와 같은 사람은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웃음을 보일 수는 있어도 진작 자신을 위해서는 환한 미소를 줄 수 없는 사람은 아닙니까?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웃음 뒤에 말못할 쓸쓸함과 고통이 있음을 말입니다.
2) 야곱이라는 사람 - 여기까지의 인생. 이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인가 아니면 실패한 인생인가?
성경에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그만큼 그 사람을 통해 말해주려는 교훈이 많다는 말이지요.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평범하지 않게 태어났습니다. 그는 형 에서 다음에 간발의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였습니다. '쌍둥이'하면 그 어감부터 재미있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사실 쌍둥이들 간에는 심각한 일이 많습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 그의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는 것은 앞으로 그의 삶이 어떤 삶이 될 것인지에 대해 알려 주는 하나의 암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름 '야곱'이라는 이름 뜻도 발꿈치를 잡았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었습니다.(창 25:26)
그만큼 첫 출생의 사건부터 야곱은 발꿈치를 잡는 인생이었습니다. 즉 형에게 장남의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는 그의 욕심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바로 '발꿈치 인생'인 것입니다.
야곱은 자라면서 어떻게 하든지 장남이 되어 집안의 가장 많은 유산을 상속받고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도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기회를 엿보던 야곱은 형 에서가 사냥을 갔다온 후 시장한 틈을 이용해 팥죽 한 그룻에 장자의 명분을 형에게서 사 버립니다. 또 아버지가 장자 상속 축복을 할 때, 아버지의 눈이 어두운 것을 이용해 아버지를 속여 형 대신 장자의 축복을 받아버립니다. 이 장자의 축복이란 오늘날 집안에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언의 문서와도 같은 것입니다.
졸지에 장자의 모든 특권을 잃어버린 형 에서는 동생을 죽이려고 합니다. 급히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갑니다.
아버지의 상속을 받아 당당하게 잘 살아보리라는 야곱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야곱은 외삼촌의 집에서 갖은 고생을 다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에든지 미치는 사나이였는지 외삼촌의 딸인 라헬을 사랑하여 그 사랑의 열정으로 한 세월을 견디게 됩니다. 그는 결국 라헬이라는 여인을 위하여 14년의 생을 보냅니다. 그리고 남은 6년을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결국 물질도 모아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외관상으로는 금의환향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분명 부자입니다. 10절의 말씀대로 그는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을 건넜지만 지금은 육축을 두 떼나 이루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질의 부요함이 전혀 그에게 평안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11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이렇게 20년을 죽을 고생하며 부자가 되어서 돌아 왔건만, 이 야곱이라는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이 사람의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3)홀로 남은 인생 -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없을 때
여러분, 다시 한 번 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여러분 속지 맙시다.
요사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부자 되세요?"라고 합니다. 이 광고를 기획한 사람은 돈방석에 앉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광고가 우리에게 인기가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광고라는 것이 깊은 인생 철학을 담은 것이라기 보다는 현실적인 가장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기에 크게 기대할 것이 못되지만 광고가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는 바로 가르치고 말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는 것보다 먼저 잘 살아야할 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우리는 부자로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을 혼돈합니다. 그래서 부자로 사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잘 사네!"하고 말합니다. 결국 잘 사는 것과 부자로 사는 것을 마음속에 동일시하고 사는 것입니다.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니 잘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잘 사는 것과 부자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잘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잘 살아야 부자도 의미가 있습니다. 잘 살아야 부자도 행복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고생 끝에 부자가 된 한 사람을 보고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부자이면서도 공포에 질려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가진 현재의 문제 앞에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움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얍복이라는 나루터에 혼자 남습니다.
22-24상반절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는 부자이면서도 혼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외롭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철저하게 무력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가진 잠재력을 무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노력과 열심도 무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집념, 인내 등은 감짝 놀랄만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그 많은 가능성과 잠재력에도 인간은 제한적인 존재이고 무능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 존재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그래서 광고 문구가 "여러분, 잘 사세요"라고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잘 살아야합니다. 물론 부자로 살 수 있으면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분명 부자가 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면서도 불행한 삶을 살지 마십시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잘 사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2. 이스라엘의 인생으로 - 해 돋는 인생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이런 불행한 인생을 살아온 야곱이라는 사람이 어느 한 사건을 기점으로 변하게 됩니다. 불행한 인생을 걷어치우고 행복한 인생, 새로운 의미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32절에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개명해 주십니다. 새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새로운 인생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변할 수 있습니다. 슬픔은 기쁨으로, 절망은 소망으로, 낙심은 새로운 희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그런 인생으로 살 수 있을까요?
1)혼자라고 생각될 때는 기회입니다.
위기의 순간은 새로운 기회임을 알아야합니다. 인생의 위기의 순간은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새로운 인생으로의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관점으로 말하면 여러분의 위기의 순간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24절에 야곱은 '홀로 남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전에 알고 있던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됩니다.
24절에 '어떤 사람'이 야곱과 날이 새도록 씨름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곧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그때 여러분이 그것을 놓치지 말고 깨달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만나 경험해야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여러분 혼자인 인생의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여러분은 혼자이기 싫어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진정 만나야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니 결혼하고서도 혼자인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면 혼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것 같아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자식을 양육합니다. 그러나 기대를 건만큼 실망과 외로움은 더욱 큽니다.
여러분,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심지어 부모도 믿지 말고 의지하지 마십시오.
제가 가정의 불신을 조장할 일이 있어 이렇게 말합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먼저 주님을 만나 경험하셔야합니다. 그래야 남편이, 아내가, 여러분의 부모와 자식이 의미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자식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남편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자식이 없어도 괜찮고 있으면 더 괜찮고, 남편과 아내가 없어도 좋고 있으면 더 좋고…'라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2) 씨름해야 할 때는 씨름하십시오
24절 말씀에 야곱이 씨름하였다고 하였는데 28절에는 그것을 표현하기를 '겨루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남아서 한 것은 하나님과 전투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야곱과 싸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야곱과 하나님이 싸운다면 그 싸움의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국 야곱이 이깁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하면 하나님이 때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인내할 것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붙든다면 이미 주님은 져주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싸운다가 포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더욱 낙심합니다. 무엇이든 힘이 든 것만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은 어느 정도로 결단하고 싸웠는지 아십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그는 싸우다가 환도뼈 - 엉덩이뼈가 부러져도 그 사람을 놓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희미하지만 알았습니다. 이가 바로 나에게 축복할 자로구나!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뼈가 으스러져도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기회가 항상 있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3)네 이름이 무엇이냐? - 부끄러운 과거라도 다 내어놓아라. 그래야 치유가 된다.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 인생으로 살기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상처를 내어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환자가 병을 고치기 위해 의사에게 찾아갔지만 환부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치료받기를 거절한 것과 같습니다.
야곱도 이스라엘이 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야곱이었을 때의 상처를 내어놓아야만 했습니다.
27절 말씀에 하나님은 야곱을 복주시기 전에 먼저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묻는 것입니까?
여러분, 여러분 중에 자신의 이름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자란 분 계시지요? (옥수수, 주길년)
저는 그런 것을 가장 크게 느낀 사람이 바로 야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을 지어도 왜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야곱의 이름 뜻이 무엇이라고요? 예, 바로 발꿈치입니다.
그는 야곱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자신의 부끄러운 인생관을 생각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형에게 지기 싫어, 차남이 되기 싫어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난 녀석'
그의 부모는 험난한 생을 살다보면 그런 애살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좋은 뜻으로 그 이름을 붙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압니다. 자신의 그런 생각으로 산 삶이 얼마나 자신을 괴롭혀 왔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그 물음에 그는 자신의 또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바로 그 분 앞에서 하나도 숨기는 것이 없이 말해야 했습니다.
야곱이 대답합니다. "나 발꿈치입니다." 다른 사람 잘 되는 꼴 볼 수 없어 발꿈치 잡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아는 야곱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으로 야곱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싸워 이긴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자신의 있는 것을 숨김없이 그대로 내어놓고 주님의 도우심과 긍휼하심을 구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마음을 다 녹여버린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을 이긴 사람입니다.
이미 다윗은 자심의 범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진정 고침 받아야할 부분을 감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숨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적당히 덮어버리지도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라면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죄는 철저히 회개하십시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여러분, 우리의 죄를 적당히 덮어두면 세월이 지나면 치유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더 곪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마음속에만 두었던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드리십시오. 그리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4)야곱에서 이스라엘의 인생으로
호12:4에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것을 눈물로 기도한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면 28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응답은 야곱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야곱의 인생을 고백했을 대 하나님이 주신 응답의 말씀입니다.
"네 이름이 야곱이다만은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제는 야곱의 인생으로 살지 말고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싸워 이긴 인생, 또 다시 풀어 말하면 하나님이 져주시는 인생으로 살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져주시는 삶을 사는 인생을 살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구하면 어쩔 수 없이 들어주시는 인생으로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이 복을 받아 누리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아멘 -(주후2002.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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