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속히 내려와 영접합시다.
성경> 눅19:1-10
찬송> 204, 208장
●주님을 만나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
여러분, 삭개오를 아십니까? 교회를 몇 년 다녀 본 사람이면 삭개오라는 이름에 익숙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시는 분들도 있으니 잠깐 소개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삭개오라는 사람을 오늘 성경 본문에 나타난 그대로 살펴봅시다.
1)2절 - "세리장이요 부자라"
그의 직업은 세리입니다. 세금 받는 관리라는 말입니다. 세리장이니 그의 지위가 꽤 높은 편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세무서장 정도 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부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당시의 세리들은 공식적인 월급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이 오늘 우리가 삭개오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도록 만드는 요건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월급이 없는데도 부자였기에 그는 더욱 문제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세리들은 월급이 없는 대신 지시된 금액만 징수하면 나머지는 자기의 것으로 챙길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고 그러니 점점 부당한 세금을 징수하여 자신의 부를 늘려 갔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관리들에게 더 많은 뇌물을 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세리들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천대를 받았고, 특히 율법을 가르치는 바리새인들로부터는 이방인인 로마인과 교제한다고 하여 불의한 인물로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죄인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부류가 둘 있었는데 첫째는 창기요, 둘째는 세리들이었습니다.
2)3절입니다. - "키가 작고"
이것은 삭개오라는 사람의 신체적인 한 면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키 작은 사람의 설움을 아십니까?
저도 키가 큰 사람은 아닙니다만 키가 좀 더 컸으면 하는 바램은 지금도 있습니다. 요사이 저의 큰아이가 키가 부쩍 커는데 이 녀석이 제 키 좀 컸다고 나에게 가까이 와서 슬쩍 키를 재어보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버지가 제법 큰 줄 알았는데 자기 키가 좀 자라니 세삼 아버지가 작아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조금만 있으면 아빠 따라잡겠네"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이것보다는 좀 더 컸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직도 자존심 상하는 말 중의 하나는 "목사님, 사모님보다 키가 작으시죠?"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제가 4센티 더 큽니다.
지난 목요일 노회 시찰 대항 체육 대회를 하는데 저희 교회가 속한 남부시찰에 젊은 목사님들이 많이 오지 않아 제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배구를 하는데 최고 약체로 보였던 우리 남부시찰이 우승한 서부시찰하고 얼마나 시소게임을 벌였는지 모릅니다. 듀스를 7번이나 하여 29대 27로 졌는가 봅니다. 우리 시찰에는 스파이크를 때려줄 킬러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저의 생각에 "내 키가 170만 넘었어도..."
여러분, 왜 작은 고추가 매운지 아십니까? 위인들 가운데 왜 키 작은 사람들이 많은지 아십니까? 그것은 작은 것의 설움 때문에 이를 꽉 물고 살기 때문입니다. 키도 작은데 야무지지 않으면 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이 삭개오라는 사람의 신체적 특성 중에 '키가 작다'는 말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3)7절 말씀입니다. -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사람들이 삭개오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수군거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삭개오의 집을 가리켜 '죄인의 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그의 집은 죄인의 집으로 낙인인 찍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을 아십니까? '순결한' '의로운'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의 이름에는 대개 부모의 소원이 담겨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상명, 상언)
삭개오의 부모는 분명 삭개오가 순결하고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여 삭개오라는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바로 이것이 삭개오의 비극입니다.
삭개오는 돈은 있습니다. 그러나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취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의롭고 순결하게 살기를 원했지만 그는 정 반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나가도 뒤돌아서면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이 자기를 향하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돈과 행복의 관계 - 잘 사는 것과 부자로 사는 것의 차이.
성도 여러분, 이전에 드렸던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잘 사는 것과 부자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근래에 가장 히트를 친 광고 카피문구가 "부자 되세요"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소원의 정곡을 찌른 말이었다고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잘 살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잘 사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다음 광고문구는 "잘 사세요"가 되면 좋겠습니다.
●완전히 회복된 삭개오
우리는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삭개오가 완전히 회복된 것을 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1)즐거움을 찾았습니다.(6)
어두운 얼굴에 생기가 돕니다.
2)돈에서 해방되었습니다.(8)
돈밖에 모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돈이 없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이런 그가 금싸라기 같은 돈을 마구 뿌립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8)
여러분,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도 돈에서 해방되어 즐거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말씀에 '아멘'입니까? 여러분 중에 "목사님, 돈 쥐고서도 즐거우면 안됩니까?"라고 말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돈 곧, 부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부자 되세요"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자 되고서 더 비참해지지 않으려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아야합니다.
잠8:18에『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알고 부자가 되려하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부자가 되면 저주입니다. 그 사람은 분명 그 부로 죄를 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이 부자가 되게 하신 목적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부자가 되어야 할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그때는 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됩니다. 그 사람은 생존을 위해 살아가지 않고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 종교와 참 종교의 차이 - 미신과 기독교의 차이/ 자신의 뜻을 위해 신을 이용하는 것은 미신 종교, 신의 뜻에 자신을 맞추는 것은 참 종교)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 하나가 있는데 부(富)는 바라는데 부를 바라는 만큼 귀(貴)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부자였지만 존귀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부는 있었지만 귀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부' 얻기를 원할 때 항상 '귀'(貴)도 함께 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사람이 추해지지 않습니다. 삭개오와 같은 삶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부와 함께 존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삭개오처럼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지 말고 진정 기쁨을 소유하고 살맛 나는 생을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삭개오는 어떻게 해서 단지 부자의 인생에서 잘 사는 자의 인생으로 바뀐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의 답이 오늘 본문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을 살펴봅니다.
●첫째,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3)
여러분, 우리가 정말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진정 잘 사는 인생이 됩니다. 부자가 되어도 존귀한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에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사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바뀌지 않으면 고쳐질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에게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돈밖에 모르던 사람이 예수님에게로 눈을 돌리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의 삶에 위기가 찾아 왔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생의 위기, 고난은 하나님께로 나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헛된 우상 앞에 절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점쟁이, 무당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게 된 것 얼마나 큰복인지 모릅니다.
혹 여러분에게 삶의 의욕이 없다면,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면 여러분의 삶의 목표를, 목적을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왜 사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돈 때문에 삽니다. 돈이 사람을 위해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돈을 위해 살게 되어 버렸습니다.(돈 귀신에 쓰인 사람 같다 - 롯의 처를 생각하라!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삶이 롯의 처와 같지 않는지. 가는 길은 천국길인데 눈길은 소돔과 고모라에 두고 온 재산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면 여러분의 목표를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관심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가 여러분의 관심이 되어 보십시오. 예수님을 더욱 잘 알고 싶어 성경공부하시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은혜를 간절히 알기 원하네"
●둘째, 뽕나무 위에라도 올라가야 합니다.(4)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여기 뽕나무는 일종의 무화과 나무로서 높이가 9-12m 정도이며 가지가 크게 퍼지고 늘 푸른 잎을 지니고 있습니다. 팔레스틴과 이집트에서는 흔히 길가에 심는다고 하며 사람들이 쉽게 올라갈 수 있는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입장에서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부자입니다. 체면이 있습니다. 또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쏠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3절의 말씀은 좀 더 자세히 봅시다. 3절의 상황이 삭개오를 뽕나무 위에까지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보기는 보아야겠는데 키는 작고 사람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저의 생각으로 삭개오가 잠시 머뭇거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가면서까지 예수님을 보아야할 것인지 아니면 스타일 구겨지니까 포기해야할 것인지?
그러나 결국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에 자신의 스타일 좀 구겨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즉 자신의 자존심을 던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님을 알고자 하는 것 외에 필요 없는 것들은 좀 던져 버립시다.
어제 저는 아버지학교 강의가 있어 오후 시간 다녀왔습니다. 아버지학교는 남자들만 모여 있는 곳입니다. 제가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학교가 왜 좋은지 몇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여자들 없이 남자만 있어 좋다. 여자들이 있다는 말은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하는 자존심이 있어 자존심 지키느라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는 남자들끼리 솔직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내어놓는데 그 자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너나 나나 다 똑 같더라'는 것입니다.
넥타이 그럴싸하게 매고 양복입고 앉아 있어도 아내와의 갈등, 자식과의 갈등 부모와의 갈등 숱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개 문제의 핵심에는 그 알량한 자존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남편인데 나를 무시해, 그래도 내가 이 집안의 가장인데 나를 어떻게 보는거야"
제가 거기에서 회비 안내고 제일 수지맞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다 남자인데 한 사람 여자가 있었습니다. 반주를 해 주는 자매입니다. 제가 그 자매보고 회비도 안내고 정말 횡재한 여자라고 하였습니다. 왜냐 그는 남자 작자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집 안 간 자매였는데 그 자리에서 남자들의 적나라한 모습, 남자 세계의 솔직한 모습을 모두 다 보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돈주고 여자가 그 공부하겠습니까? 그 속에는 그녀의 아버지 연령의 사람으로부터 이제 막 결혼을 한 사람까지 다 있었으니 그 자매는 남자 공부를 참 많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자매가 아버지학교 할 때마다 계속 봉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토요일마다 하는데 제법 늦게 마치거든요. 그런데 그 자매는 자기가 좋아서, 그리고 오면 은혜가 되니까 봉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자매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느꼈느냐고. 그 자매의 말이 첫째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 다음은 남자들이 이렇게 눈물이 많은지 몰랐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앞으로 자신과 결혼할 남자는 꼭 아버지학교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학교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남자들의 가슴을 찡하게 하고 눈물이 핑핑 돌게하는 것은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며 자기 자신을 다 내어놓고 하나님 앞에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존심, 체면을 내려놓기 시작하니 주님이 들어오실 공간이 생긴 것입니다.
●셋째, 속히 내려와 영접해야 합니다.(5-6)
삭개오는 주님이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말씀에 급히 내려왔고 즐거워하며 영접하였습니다.
이 삭개오의 행동은 이제 마땅히 우리가 보여야할 반응입니다.
주님은 삭개오를 생각하시고 여리고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것을 어디에서 알 수 있느냐하면 예수님이 삭개오와 생면부지임에도 뽕나무 앞에서 위를 쳐다보며 바로 "삭개오야"하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주님이 오늘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내가 주님을 알기도 전에 주님은 나를 아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항상 하나님이 먼저 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 찬송 98장 -"그 친구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주님은 여러분을 잘 아십니다. 여러분의 사정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인생의 곤고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결단 - 주님을 모셔라
오늘 본문의 성경에서 주님은 삭개오가 스스로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요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내가 네 집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셨고 '가자'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자신의 의사를 밝히신 것입니다. 그것은 '네가 나를 영접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의 영접을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주님이 능력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시고자 하면 자신을 대적하는 사울을 꺽어 바울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인격적 결단으로 주님을 모시기 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전기는 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하여 한전이 전기 선로를 통해 각 가정까지 보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의 집이 밝게 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집의 스위치를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한전에서 그 스위치까지 올려주지는 않습니다.
수돗물 역시 그렇습니다. 정수장을 거치고 배수장을 거쳐 수도관을 통하여 물은 우리집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는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수도꼭지를 우리의 손으로 틀지 않는 이상 그 풍성한 물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계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열면' 열지 않으면 주님과의 교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진정 잘 사는 인생이 되도록 우리의 진정한 관심이 주님께로 옮겨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뽕나무에라도 올라가면서 우리의 자존심을 버리기를 소원하십니다. 이제 속히 내려와 영접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에게 마지막으로 하셨던 주님의 선언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주후2002.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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