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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모세와 선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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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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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날의 모세와 선지자들
성경> 눅16:19-31
찬송>249, 270장


●들어가면서 - 우리 곁에 있는 죽음, 그리고 천국과 지옥.
한국 사람들만큼 죽음을 터부시하는 민족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항상 복보다는 저주의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묘지가 어디에 있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묘지는 사람이 사는 마을과 가급적 멀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분리해 놓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무덤은 우리만큼 격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마을 중앙에 공동묘지가 있는가하면 또 교회당 안에 납골당이 있습니다. 결국 문화의 차이이지만 그 문화 가운데 죽음에 대한 사고의식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경기도 분당의 할렐루야 교회는 교회를 신축하면서 교회당 안에 납골당을 만들려는 설계를 했다가 결국 당회에서 거부되어 무산되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문화가 그것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 목사님은 미국에서 오래 사시다가 온 분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납골당이 있으면 좋은 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절이면 묘지를 한 번씩 찾지 않습니까? 교회 납골당에 모셔 유골을 모셔 두면 명절에 어디로 가겠습니까? 기일이 되면 어디로 모이겠습니까? 결국 교회로 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시내 중심부 도로변에 무덤마을이 있습니다. 이 무덤마을은 약 300년 전에 이집트를 통치했던 오스만 터어키 사람들의 무덤입니다. 오스만 터어키가 망하자 터어키 사람들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그들 조상의 무덤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집단적이 무덤을 공동묘지라고 말하지 않고 무덤마을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그 무덤에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이로의 빈민들이 그 무덤을 집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우리나라의 무덤처럼 매장하는 것이 아니고 3,4평정도 되는 건물에 관을 넣어 두는 형식의 무덤임)
죽은 사람의 집에 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사람이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산 사람이 무덤을 드나들고 있으니 그들만큼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죽음을 앞에 두고 한국 사람처럼 처량하고 비통하게 우는 민족도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 만큼 죽음과 삶을 분리해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젊은 청년들을 지도하면서 가슴 아픈 일을 몇 번 경험했습니다. 어제 주일 저녁까지만 해도 밤 예배에 찬양을 은혜롭게 인도하던 친구가 연탄가스로 다음날 아침 자취방에서 싸늘한 시체로 눈도 감겨지지 않은 채 누워있는 것을 보았을 때 정말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느 한 여 청년의 시신과 함께 서울에서 운송차량에 동승해서 부산으로 밤새 내려오면서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기억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죽음이란 우리 바로 곁에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기분이 나쁘실지 모르지만 오늘 밤에 우리의 모습에 대해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잠27:1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누구에게나 다 오는 죽음
오늘 성경 본문에도 두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물질로는 부족한 것이 없는 부자였고 한 사람은 그 부자집에서 먹다 버린 음식을 건져 먹고 배를 채우는 거지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자도 죽고 거지도 죽었다고 했습니다.(22)
이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수고는 항상 실패로 끝났습니다. 앞으로도 이 죽음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곧 과학으로 이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사이 의학의 발전과 사람의 유전자 염색체의 염기 서열을 해독한 게놈 지도가 완성이 되었다고 이제 곧 불치의 병도 치유되는 날이 온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봤지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창세기에 첫 시대의 사람들만큼이나 살겠습니까? 900살까지 사람들이 살겠느냐 말입니다. 살 수 있다고 해도 어쩌면 죄성의 인간들이 징그럽게 오래 산다고 죽여 버릴지 모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생명은 하나님이 자신의 권한에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정말 과학이 발달되어 사람의 생명을 건드릴 수 있는 날이 온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저는 그러기 전에 하나님이 세상을 먼저 심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창 3:22)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4)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생명나무는 영생의 나무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따 먹지 못하도록 천사 그룹을 두어 화염검으로 지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생명나무에 손을 대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정말 생명나무에 손을 대면 하나님은 화염검으로 그들을 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국 죽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의 실재함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죽은 다음입니다.
오늘 성경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 다음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동화 속의 상상의 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착하게 살라고 교훈하기 위한 동화 속의 상상의 나라가 아닙니다. 저는 동화책 속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속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혹 우리를 향해 어찌 그런 것을 믿느냐고, 어리석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 과학 시대에 사람이 달나라를 오고 가는 시대에 그런 것을 믿느냐고, 우리를 향해 미련하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미련함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미련함 때문에 여러분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전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고, 고전 1:27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의 분명한 것은 천국과 지옥은 있고 사람은 이 두 세계 중의 한 세계로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죽음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면, 이제 죽음 다음의 세계인 천국과 지옥도 바로 우리 곁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지옥의 고통
우리가 죽음을 두렵고 떨림으로 바라보아야하는 것은 죽음 다음에 다가오는 지옥과 천국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극과 극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욕에 “지옥에나 내려가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만큼 저주의 말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을 전하는 친구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도하는 친구가 복음을 거부하는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만약 이렇게 복음을 거부한다면 안 된 이야기지만 자네에게 남을 거라고는 지옥 밖에 없네”
이 말을 들은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나는 지옥에 가겠네. 자네나 천국 잘 가게나”

여러분,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십니까? 혹 여러분이 장난으로라도 이런 말을 했다면 빨리 용서를 구하시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처럼 그들에게는 “주님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오늘 본문에서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23-24절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 뜨거운 불 - 성경은 지옥을 말할 때 항상 불을 말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불 가운데 당하는 고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뜨거움도 뜨거움이려니와 갈증은 또 얼마나 나겠습니까? 지옥을 간 부자의 말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물 한 방울이 아쉬웠으면 천국에 있는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찍힌 물 한 방울도 이렇게 간곡하게 구한단 말입니까?
성경에는 불과 유황이 자주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과 유황은 지옥에 떨어졌어도 계속 괴롭히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도 하늘에서 불과 유황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계 14:10)에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막 9:49)에는 지옥의 고통을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 긍휼이 없는 곳 - 그러나 지옥의 더욱 비참함은 긍휼이란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며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불쌍해서라도 누군가 이를 도와 줄 것입니다. ‘큰 부탁도 아니고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인데 그것 못해주랴’ 생각하고 해 줄 것입니다. 아니 돈 드는 일도 아니고 조금 더 보태 물 한 컵은 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그것이 없습니다. 철저히 외면당하는 곳입니다. 봐 주는 것이 전혀 없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곳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입니다.(눅13:28)

예)저는 사람들의 마지막 임종을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죽음이란 예외가 없이 다 똑 같이 오지만 그 마지막 모습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사의 모습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정말 사탄의 모습이 따로 없을 정도로 험악한 모습으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이 실존하며 그 세계의 극과 극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옥, 어떻게 해서라도 가서는 안 될 곳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18:8-9에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세상에서 손을 자르고, 발을 찍어 내버리고, 눈을 빼어 내버리는 것이 낫지 지옥에 만은 가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지옥은 어떻게 해서라도 가서는 안 될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 믿고 구원받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부자가 지옥에 가게 된 이유
그러면 이 부자가 천국에 못 가고 지옥에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에서는 이 부자가 믿음이 없어서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교리적으로 본다면 분명 이 부자는 구원의 믿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천국 가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천국에 간 거지의 경우도 믿었다는 말이 없기 때문에 천국 갈 이유도 찾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부자의 죄는 무엇이기에 지옥에서 그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는 자신의 대문에 있는 거지를 더럽다고 내쫓거나 구타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입니까? 무관심입니다. 그는 그의 대문에 있는 불쌍한 거지에 대해 무관심 했던 것입니다.
그가 외출복으로 좋은 자색 옷을 입고 다녔기에 죄가 아닙니다. 그가 속옷으로 질 좋은 베옷을 입었기에 죄가 아닙니다. 그가 연회를 자주 열었기에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면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그가 보여야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삶에만 관심이 있었지 자기 집 대문 앞의 거지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거지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어떤 병이 들었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이라고는 오직 자신의 삶의 풍요에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부자처럼 먹고 남을 정도로 풍족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는 복을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웃을 구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우선한 존재 이유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돈을 주지 않은 것은 교회의 본질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교회가 자신의 것을 누리고 즐기면서 만족하고 영적인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향해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이 부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환난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인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그들 자신만의 풍요로움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 역시, 우리의 가족, 친지, 이웃에게 나 혼자 천국가게 된 것으로 만족하고 산다면 우리는 이 부자와 다를 바 없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을지니라”(29)
우리는 이 부자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오늘 이 부자가 가장 간절하게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 말해주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지옥에 간 부자가 이미 자기에게 이루어진 모든 저주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마지막으로 요청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7-28절 말씀입니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요청마저 거절당했습니다. 정말 지옥은 조금의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 부자의 요청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29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여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천국 갈 수 있는 길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고통 속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가나안으로 인도한 사람입니다. 그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가 간절하게 기도한 사람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의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구원받을 백성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불러 이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사도 흠모할 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죽었다가 산 사람을 통하여 이 일은 하지 않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할 일군들을 통하여 이 일을 하십니다.(31)

우리는 이제 '장산2002-JUMP400 Vision'을 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더라도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부담이 되더라도 세상적이지 않는 거룩한 부담을 여러분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이 시대, 이 지역에 하실 일이 있습니다. 금년의 표어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하십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행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광야에 길을 내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막에 강들을 내겠다고 하셨습니다.(사 43:19-21)

하나님의 귀한 역사에 여러분 자신을 드려서 더욱 큰 은혜와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 멘 -(주후2002.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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