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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

너는 나를 따르라
  • 날짜 : 2006.4. 2
  • 설교자 :
  • 본문 : 요한복음 21:18-25
성경본문 및 요약
●들어가면서 - 흔들리지 않았으면…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어떤 성도들에게서는 참 감사가 됩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믿음을 보면서 감사하게 됩니다. 정말 많이 자랐구나! 어떻게 저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보는 것은 단순한 감사를 넘어 감격이며 감동입니다. 목사라는 직책이 결코 신앙수준을 말하는 것은 아님을 알지만 제가 과연 그런 상황에 놓여졌다면 저 사람처럼 저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을까? 저렇게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너무 실망스러운 성도들도 있습니다. 믿음이 안 자라도 왜 그렇게 안 자라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다 연약한 자이지만 너무 하찮은 것에 믿음이 바닥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겐 그게 하찮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심각한 것이었겠지요.
하지만 이제까지 믿은 하나님이 그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가 싶어 너무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믿는 하나님이 곧 내가 믿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정말 성격도 좋으시지 저 사람에게 저렇게 취급을 당하시고 그대로 계시다니!”

그러나 실은, 하나님의 긍휼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진멸되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녀들을 인간적인 성질대로 취급을 한다면 내쫓고 포기를 해도 몇 번이고 포기할 일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내 아들이기에, 내 딸이기에 참고 또 참는 것입니다.(참 더러운 게 부모라고 하더니…)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보다 훨씬 더 냉철하시고 단호하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우리가 결단하는 일의 결과를 모르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한 번 작정하신 일은 그 결과까지 내다보고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자녀들에게 가혹하게 할 수 없는 것은 자녀를 생각하는 당면한 동정심과 벌을 주는 일에 대한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하시는 일에 대해 실수도 하지 않으시고 후회할 일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본문의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가 처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할 그 때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녔던 수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죽는 것을 보고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고 도망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여전히 죄책감 속에 자신을 자책하며 무기력한 이전 생활로 돌아간 때였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다시 찾아가셨고, 베드로는 처음 헌신의 고백을 했던 바로 그 갈릴리 바닷가에서 또 다시 세 번의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사랑고백을 받을 때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곧 이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전에 이렇게 말했던 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습니다”(마26:33)
이것은 베드로가 은혜 받았을 때의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천하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분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분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도 부인했고 낙심, 좌절했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예수님은 그를 또 다시 그를 찾아가셨고 그를 회복시키시면서 그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에게 해 주시는 주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1.내 원대로 안 돼도 주를 따라갑시다.(18)
이 말을 풀어서 말하면 ‘더 이상 네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인생이 아니다’입니다.
이 말대로 되는 것은 잘 되는 것입니까? 잘못 되는 것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인생을 살라고 하면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베드로는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것입니다.
띠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걸을 때나 달릴 때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겉옷을 띠로 둘렀습니다. 18절은 베드로가 젊었을 때는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결정하고 행동하며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란 현재까지의 베드로의 모든 기간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보냈던 시기와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의 시기 모두,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의 자유를 제한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말은 베드로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씀이라고 19절에 해석을 붙여놓았습니다.

사람이 혹시 젊었을 때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속을 받으며 살았을지라도 점점 나이가 들수록 자유로워져야합니다. 젊을 때는 고생했더라도 나이가 들어서는 좀 편해야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정반대입니다. 젊어서는 자유롭게 다녔지만 늙어서는 그렇지 못하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8절 다음의 19절에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후의 우리의 삶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든 안 되든 예수님을 좇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항상 복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내 마음대로 하며 살았을 때는 거의 다 죄짓고 살 때입니다. 그땐 분명 돈도 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제법 우러러 볼 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거나 생각에도 없을 때였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사는 삶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됨’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때가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남은 때가 더욱 영적인 세월이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시기가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고서도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면 바로 낙심하고 좌절해 버립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뜻에 맡겨진 인생이 내가 원하여 몰고 가는 인생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편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혼한 사람들 중에 믿은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간에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한 사람치고 순탄한 길을 걷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결혼 후에 울고불고 사느니 못 사느니 하는 사람은 결혼하기 전에 죽고 못 사는 관계였던 사람이 많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사랑이 절대적인 가치이며, 다른 것은 자신의 사랑에 비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그것 외에도 중요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중에 알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원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었구나!’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베드로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 때가 행복했을까요? 그가 행복했더라면 예수님을 왜 따라 갔겠습니까? 이미 가정도 있는 사람이 말입니다. 그는 조국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메시야를 기다린 사람입니다. 고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물고기만으로 생의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드디어 행복의 구체적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가 되면서 말입니다. 베드로의 그 행복한 모습이 사도행전에 나타납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힙니다. 위협과 핍박, 고문을 당합니다. 그러나 심문을 당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며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도리어 큰 소리를 칩니다. 가야바의 뜰에서 두려워 계집종에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가 이제 감옥에서도 찬송하고 담대하게 증거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만든 것입니까?
그는 이제 알게 된 것입니다. 행복은 자기의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 선생이 가르쳐준 대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약 4:13-16)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래서 십자가를 앞 둔 우리 주님의 생명을 건 기도가 바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니다"(마26:39)이었습니다.

♬찬송198장-2절 “나 가는 길 비록 좁고 내 뜻대로 안 돼도/ 모든 욕심 다 버리고 주만 따라 가겠네”

예수님은 중요한 말씀을 강조하실 때는 ‘진실로’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셨습니다. 18절 말씀에도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셨으니 18절을 정말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진실로’라는 말의 원어는 ‘아멘’입니다. 예수님이 그 당시 말씀하실 때는 “아멘 아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먼저 베드로가 이 말씀을 “아멘 아멘”하고 받아야 했고, 이제 우리가 이 말씀을 받을 때 “아멘 아멘”하고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실족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생략하고 넘어갈 것입니다. (2. 잘 이해가 되지 않아도 주를 따라갑시다.
분명히 베드로는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2. 다른 사람들을 보지 말고 주를 따라갑시다.(22)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요한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20절에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요한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쓴 글에서 자신을 꼭 이렇게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썼습니다. 베드로는 요한의 앞길에 대한 궁금함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길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는데 요한은 어떻게 될까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
예수님이 자신에게 해 주신 말씀의 분명한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의미심장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요한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요한도 과연 나와 같은 길을 가려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
이 말은 곧 제자들 사이에 요한은 죽지 않는다는 의미로 전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말씀을 이렇게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23)

우리는 요한과 베드로가 어떤 모습으로 일생을 마쳤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정말 예수님의 말씀처럼 순교를 했고,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 유일하게 장수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니 요한이 죽지 않겠다고 전해진 말은 틀린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23절에 요한은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의도로 말씀하신 것이라고요?
그것은 22절에 기록된 그대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다른 번역 성경(현대인성경)에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해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로 해석하였습니다.
즉,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너만 나를 잘 따르면 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기에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혹 우리의 신앙생활의 실족할 이유들이 다른 사람들 때문은 아닙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저렇게 잘 풀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인생이 꼬이는 것인가? 일차로 여기에서 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제 2차로 예수 믿는 사람들과 비교를 해 봐도 아닌 겁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나은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잘 되고 나는 왜 이런가?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 각자 자신이 가야할 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의 길이 있고, 요한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살아서 영광을 돌리고, 어떤 사람은 죽어서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요한보다 일찍 죽기 때문에 베드로의 인생이 억울한 인생이라면 사실 베드로보다 훨씬 더 일찍 죽은 제자도 있습니다. 야고보입니다. 그는 사실 3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훈련 잘 받아 놓고 교회가 태동하자마자 죽었습니다. 당시의 헤롯 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으려고 유대종교지도자들이 경계하는 신흥종교인 기독교의 지도자를 없애면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생각하고 시험 케이스로 야고보를 죽인 것입니다. 그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이것에 고무된 헤롯은 이제 수장 격인 베드로를 죽이기 위해 감옥에 또 잡아넣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극적으로 살아남습니다.(행12장)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 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행12:1-4)

살아남아 오래 산 순서로 이들의 인생의 가치를 말한다면 가장 무가치한 인생이 야고보, 그 다음에 베드로, 가장 값진 인생은 요한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또 세례 요한은 어떻습니까? 광야에서 고생고생하며 훈련했던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 태어났고 주님을 위해서 산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는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헤롯 왕에게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 사람만큼 억울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난 사람 중에 요한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것 없습니다. 나는 나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눈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길이라면 그 길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즐기면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서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복음송- “나 혼자서 그 길을 가네/ 나 혼자서 가야하네/ 누가 대신 가 줄 수 없네/ 나 혼자서 가야하네”

●맺으면서 - 내가 가는 길이 믿음의 길이면 만족하며 갑시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길에 얼마나 시험꺼리들이 많은지요. 그러나 그 시험의 대부분은 나 자신으로 인한 것입니다. 내가 병이 드는 것은 병원균에 노출되는 이유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 몸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던지 내가 가는 길이 믿음의 길이면 만족하며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람을 높이시기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그 어떤 경우에라도 주님은 우리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더 낙심, 좌절하지 말고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영적 생명의 허덕거림을 경험하지 맙시다.

♬“주님만 따라 갈래 딴 생각은 안 할래/ 주님만 생각 할래 딴 덴 가지 않을래”
주님만 따라 가면 참된 행복 있겠네 주님만 따라가면

할렐루야, -아멘-(주후200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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